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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흙

 

김장언/ 기획자, 평론가

 

 

오래 전에 내가 조은지를 강연 프로그램에 초대했을 때, 그녀는 당시 사회적 이슈 한가운데 있었던 한 스님을 초대하고, 자신은 그 스님이 강연을 마친 이후에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스님은 고속철도를 위한 터널을 산에 뚫겠다는 정부에 맞서 소송을 진행하면서 단식을 하고 있었다. 스님은 환경과 개발 그리고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과 더불어 이야기했다. 그리고 작가는 친구들과 러시아 민요인 ⟨백만송이 장미⟩를 불렀다. 서울의 한 시장에서 불법이지만 공공연히 판매되는 식용개들을 보고, 더운 여름 우리의 몸을 보신하기 위해서 개를 먹는 그 날에 작가가 개들 앞에서 불렀던 그 노래를 다시금 스님의 강연 이후에 불렀다. 스님은 극한적인 단식을 하면서 개발에 저항했지만, 지금 터널은 뚫려 고속철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작가는 이제 흙에 대해서 노래한다.

70년대 유행했던 가요 중에 ⟨흙에 살리라⟩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목가적 삶을 표상하면서, 고향에서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노래는 한국 산업화의 슬픈 한 단면을 보여준다. 60년대 이후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 과정 속에서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직업과 돈을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다. 물론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는 농업도 포함되었지만, 당시 도시로 향하는 젊은이들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노래는 당당히 자신은 농촌에 남아 흙에 살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유행할 당시 그 선언은 그들의 바램이나 혹은 자위처럼 여겨진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젊은이들은 도시에서 상처받은 자신의 삶을 회복하고자 근원적 삶의 한 형식으로써 농촌, 즉 흙에 살겠다고 선언하고, 농촌에 남겨진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자괴감을 극복하고 위로 받고자 근원적 삶의 형태로서 흙에서의 삶을 강조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노래는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도시에 있든 농촌에 있든 그 젊은이들이 혹은 우리가 자연과 합일된 삶을 더 이상 꿈꿀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상실과 자위의 엘레지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육면체로 흙을 만들어 흙과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녀가 흙과 함께 검문소를 통과하는 것을 보면, 검문소의 사람들은 그 흙을 흙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흙은 자신이 흙으로 선언되는 순간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다. 어머니와 같은 땅, 흙은 또한 모든 미생물과 해충들의 서식지인 까닭에 자신의 이름과 모습으로 국경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흙은 이제 변신했으며, 작가와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그녀는 왜 흙과 탈출을 도모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흙과 자신은 같이 탈출을 도모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했다고 말한다. 탈출을 위한 그녀의 이유는 자신의 삶의 불가능성에 대한 어떤 자각에 의해서 나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죽어가는 개들 앞에서, 터널을 막아내기 위해 단식하는 한 비구니의 눈물 앞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생계 앞에서 탈출을 꿈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흙과 같이 하는 것일까? 작가는 2008년 ⟨원형의 시⟩를 발표한다. 원형은 원형(圓形)과 원형(原形)이라는 동일한 발음 속에서 다른 의미로 세상에 퍼져 나간다. 둥그런 지구와 근원으로서 지구, 그리고 흙. 나뉘었지만 다시 만나는 모든 열린 개념에 대한 원형(圓形)과 원형(原形)을 이야기하는 작가는 인간이 흙으로 되돌아 가듯이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렸던 것인지도 모르며, 그러한 차원에서 자신의 근원으로서 흙을 상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흙은 더 이상 근원적 의미의 흙이 아니다. 지난 해 봄, 뉴스는 의례적으로 한강 공원에 돋아난 쑥을 캐어 요리해 먹지 말 것을 당부하는 보도를 냈다. 봄나물로 쑥을 즐겨먹지만, 한강 공원의 흙이 이미 중금속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 돋아난 식용 나물은 더 이상 먹을 수 있는 나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땅, 흙은 오래 전부터 자본의 또 다른 지수로 사용되었다. 전 국토는 판매가격이 기록되며, 분기별로 그 가격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표시한다. 흙의 변신은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언제나 우리의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대로 타자화되었다. 작가는 육면체로 흙의 탈출을 돕기 위해서 변신 시켰지만, 흙은 땅은 이미 우리들에 의해서 변형되고 오염되고 다시 복원된다. 사람들은 산을 관통하는 구멍을 내기도 하며, 바다를 매워 땅 아닌 땅을 만들기도 한다.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의 땅을 파헤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도 하며, 파괴된 땅을 자연답게 되돌리기 위해서 또 다른 공사를 진행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흙을 변신 시키고, 그와 함께 탈출을 도모하고, 성공한다. 그리고 탈출 이후 짤 없이 이별을 고한다. 작가의 말 그대로 ‘눈물 보다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별을 위해서 그녀는 자신이 변형시킨 육면체의 흙을 뜯어 멀린 날린다. 그리고 흙은 ‘퍽’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근대라는 분리의 경험 이후, 우리는 자연과, 자연은 우리와 더 이상 합일 될 수 없으며, 각자는 자신의 삶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러한 공모와 탈출 그리고 이별을 이후로도 반복한다. 작가는 땅의 님프처럼 파주에서 광주로, 서울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헤이그로 흙의 탈출을 돕는다. 그리고 자신도 탈주한다.

국경 없는 마을에서 작가는 먼지를 모아 전시장에서 2m 사이즈의 투명한 정육면체 안에 놓는다. 먼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거주지인 ‘국경없는’ 마을에서 온 것이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은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은 불법 체류자인 문서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마다 고비 사막에서 시작되는 모래 바람은 서울로 불어 닥친다. 모래인지 먼지인지 모를 그 누런 바람은 국경을 넘어 이동하면서 우리에게 봄을 알리는 고약한 신호였다. 그러나 이제 그 바람에 실려오는 흙과 먼지는 중국의 공업지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오염물질로만 인식될 뿐이다. ‘국경없는’ 마을의 ‘문서 없는’ 사람들은 어느새 한국사회에서 우리를 오염시킬 잠재적 존재로 파악된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초대하거나 받아 들이지만, 그들이 어떤 구성원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들을 오염된 존재로 아니면 오염시킬 존재로 받아 들인다. 오염되었다고 잠재적으로 인식되는 흙이 검역소를통과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흙은 국경과 상관 없이 이동해 왔다. 메콩강은 티베트에서 발원해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흙들을 이동시킨다. 국경은 우리가 만들었던 경계일 뿐 흙은 언제나 자유롭게 순환되었다. 그러나 지금 공식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있는 흙은 다국적 화장품 회사에서 판매하는 진흙만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살균과 멸균의 과정을 거쳐 다양한 향신료와 함께 버무려진 이 진흙은 국제적으로 공인되어 유통된다. 작가는 ⟨국제적 진흙⟩을 입고 서있다. 퍽하고 하얀 티셔츠 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흙을 입고 서있다. 그리고 하얀 깃발 위에 퍽하고 살아가는 흙들을 ⟨유기농 깃발⟩이라고 이야기 한다. 흙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는 생명과 생태, 즉 녹색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일까?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서 전세계 노동자들에게 단결을 강조했던 국제주의의 이상은 이제 삶의 회복을 위해서 녹색의 깃발 아래 뭉쳐야 하는 것일까?

⟨GREEN UNDERGROUND⟩에서 작가는 엄청난 양의 Green을 소비해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Green은 녹색으로 대표되는 환경과 생태만을 문자 그대로 의미하지 않는 것 같다. 작가는 근대화 이후 야기된 그리고 지금까지 지속되는 모든 개발 이데올로기를 커다랗게 Green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언뜻 Green으로 대표되는 생태와 환경은 우리의 삶을 구원할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것 역시 지금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욕망의 잉여물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바다를 막아 멀쩡한 갯벌을 땅으로 만든 이후, 죽어가는 땅을 보며 그 위에 생태해양공원을 건설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모순적이고 기형적이다.

최근 생태학 이론에서는 ‘좋은 어머니’, 가이아(Gaia)로서 지구, 땅을 바라보기 보다 ‘나쁜 어미니’, 메데이아(Medea)로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 메데이아는 황금양털을 훔치러 온 아이손의 매력에 이끌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배반하고, 아이손을 조건 없이 돕고, 새로운 세계로 떠난다. 그러나 아이손이 자신을 배신하자 메데이아는 아이손이 사랑하는 연인과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 간다. 작가는 이제 흙이 아니라 돼지비계의 탈출을 돕는다. 흙이 비계가 되었다.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땅에 묻으면 가이아가 알아서 그것을 처리해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땅은 메데이아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죽음의 징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작가는 <땅이 말했다>에서 땅의 명령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침묵하라’. 메데이아는 아이손을 도왔지만 그의 윤리가 부재한 행위와 배신 앞에서 모든 것을 파괴한다. 작가는 흙의 탈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 흙의새로운 삶을 돕기 위해서 흙을 뜯어 세상에 던진다. 흙은 ‘퍽’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실재로 우리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기괴한 굉음이다. ‘땅’이라고 그 소리를 언어적으로 표시하지만 그 소리는 언뜻 총이 발표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메데이아로서 땅이 가이아로 다시금 변화될 때, 인간이 그곳에 존재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는 이제 우리에게 침묵할 것과 유지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