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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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_Mud Poem (2008 version)
Where is my L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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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_Mud Poem
They got paid and left to take a br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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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s
The Song of Sisters with Eight Eyes/ Jinshil Lee, 2020
Training the minds to go visiting Eunji Cho/ Eunna Bae, 2018
The Heat, the Wind: Eunji Cho’s Elemental Existentialism/ Heejin Kim, 2017
‘살아냄’을 그리는 아슬아슬한 풍경/ 김미정, 2017
Intimate Revolt: on Eunji Cho’s Falling Eggs/Ha Jin, 2016
Life and Earth/ Jang Un KIM, 2011
조은지의 진흙 퍼포먼스: 땅의 탈출에서 땅의 영매까지/ 최영숙, 2011
조은지: 언어를 거스르는 유쾌한 언어들/ 정은영, 2006
© Eunji Cho 2020
궤도의 외부에서 내부로 틈입되는 혼성적인 목소리
김장언/ 기획자, 평론가
나는 런던이라는 공간에서 한 백인 여성에게 철저히 비성애적 존재로 남아 있었지만, 아그리젠토에서 나는 어떤 노신사에게 성적 대상으로 여겨졌다. 파리에서 만난 한 일본 여성은 나를 전형적인 한국 남성으로 대했지만, 그녀가 경험했던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성과 같은 모습을 내가 배반하자, 그녀는 떠나갔다. 교토의 유스호스텔에서 만났던 호주출신의 나보다 세살 어렸던 어떤 사람은 내가 한국인임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나에게 가장 먼저 나이를 물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런던의 삭막한 인도인 밀집 주거지역에서 나는 이국적인 향신료의 냄새를 맡고 저렴한 탄두리 레스토랑에서 한 끼를 해결했지만, 서울의 고급스러운 인도풍 레스토랑에서 내 돈 내고 음식을 사 먹지는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와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서 안산에 갔을 때, 거리에서 파는 커다란 만두를 보고 나는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에서 먹었던 만두를 떠올렸다. 그리고 우연히 도쿄의 한 지하철역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그 모습이 서울의 또 다른 지하철역에서 비추어진 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세계가 전지구적으로 균질화와 혼종화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매번 다른 타자들과 교섭한다. 나는 근대적 주체이기도 했다가 불완전한 타자로 위치지어졌다가 다시금 그 사이에서 분열한다. 국경을 넘는 물리적 조건이 아니더라도, 미시적 삶의 조건과 그 시공간에서 나는 매번 새롭게 경험 하는 타자들과 교섭하며 나를 변형시킨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그리고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 것일까. 동시대문화속에서 우리가 그 시대를 재현할 수 있는 굳건한 시각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우 근대적 주체의 문제로 계속 나를 환원시킨다.
복날에 죽어간 개들을 위한 연약한 서사형식
조은지가 복날에 죽어 간 개들을 위해 개농장에서 ‘백만송이 장미’를 부른다고 했을때, 나는 솔직히 그녀의 그런 작업에 대해 많은 이해를 갖고 있지 못했다. 소극적 의미의 채식주의자인 그녀에게 복날에 죽어간 개들을 위한 콘서트는 그녀가 구성해온 삶의 조건들 속에서 그다지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콘서트를 다소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청계산의 도롱뇽을 위해, 개발과 자본의 논리 속에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웠던 지율스님을 초대해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했을 뿐이다. 채식주의자이자 동물애호가인 젊은 작가가 자신의 관심영역에 대해서 기존 미술계가 갖고 있는 전형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움직임들을 고안하고 실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본격적으로 금성일식이라는 밴드를 조직하고 연습했을 때, 나는 그녀가 대중음악을 통해서 또 다른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기대하는 혹은 대중음악의 일반적 코드들을 기본으로 하는 음악들로 나아가기보다, 철저히 그것을 배반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음악에 대한 기본 개념이 ‘보기엔 음악, 들으면 예술 looks like music, sounds like art’인 것처럼 음악과 예술 사이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그러한 그녀의 음악을 단순히 음악적 훈련이 잘 안된 상태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초보적인 어떤 상태라고 생각했다. 결코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치닫는 현대 예술의 끝없는 모호함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으며, 실험을 위한 실험을 시도하는 듯한 자아도취적 음악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우리가 대중음악을 통해 기대하는 스펙터클한 어떤 지점을 언젠가는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문화적 게임의 법칙에서 또 다른 타자로 응시하기
지속적으로 나는 작가 조은지가 본격적인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가 처한 현재의 물리적 조건이 늘 그녀의 작업을 방해 한다고만 여겼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논쟁의 지점에서 예술적 개입을 시도 하는 그녀에게 보다 본격적인 행위를 요청하기도 했으며, 대중음악적인 작업을 보다 대중적으로 시도하기를 주문해보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나의 요청은 기존 현대미술에서 발견하게 되는 어떤 움직임들을 그녀가 재생산하기를 기대하는 일이었다. 한 작가의 고유한 맥락과 그 텍스트를 나의 맥락 내부에서 정형화시키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은지의 작업은 언제나 기존 사회와 미술제도가 관례적으로 틀지운 서사형식들에 빗겨가면서 연약한slender 어떤 지점으로 미끄러졌다. 나는 그녀의 이러한 ‘연약한 서사형식 slenderness of narrative’을 정 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자친구 없으면 자가용도 없다. /oh my darling, 나만 보고 웃어 주세요...... 오늘은 그를 구찌 매장으로 데려갈까 생각한다. 그보다는 우아한 /샤넬로 갈까 아무래도 블랙앤드화이트의 클래식이 좋겠지. /내가좀더우아해보 인다면 재현씨는 나를 더욱 사랑하겠지. /그가 그날 피곤해 보였던 건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아주 바쁜 비지 비지 비즈니스맨이니까......
길에서 담배 피우는 후진 취향의 저 여자를 빨리 지나쳐 버려야지. /우아하지 못한 건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쳐다보지 않고 /품위 있게 지나치는 것이 좋다......
⟨남자친구 없으면 자가용도 없다⟩ 중에서
조은지가 가사를 붙인 이 노래는 동시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개인의 욕망을 표현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에는 펫샵보이즈 Pet shop boys의 ‘웨스트 엔드 걸스 West end girls’ 와 같은 분노와 저항 그리고 염세는 없다는 점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펑크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업타운 스타일의 동경에 가깝다. 그리고 가사에 등장하는 소녀의 욕망은 부르디외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독학그룹 소녀들의 왜곡된 무엇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자가용은 그녀의 것이 아니며, 그녀의 취향은 남자친구에 의해서 결정된다. 부르디외에서 독학그룹의 문화적 행태들은 물론 다양하게 표출된다. 그런데 이 노래에 등장하는 그녀의 속삭임은 매우 제도 친화적이고, 그것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포기하고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계급의 문화적 취향을 학습하며, 그 게임의 법칙에 동참하는 듯 보인다. ‘후진 취향의 저 여자’는 그녀의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가 ‘재현씨’의 피곤함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씨의 피곤함은 그녀가 이해해야만 하는 과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동시대 여성의 이러한 허영과 분열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일까.
텔레비전은 오늘도, 순수하지만 억척스러운 여성들이 이 시대의 ‘왕자님’인 부잣집 아들과 로맨스를 키워나가는 드라마를 방영한다. 왕자님들은 어느시대나 ‘신데렐라’를 사랑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신데렐라는 ‘계모’의 적극적 삶의 의지에 의해 결코 왕자님을 만날 수 없거나, 혹은 사랑을 성취한다고 할지 라도 이혼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신데렐라를 사랑한다는 왕자님은 신데렐라가 꿈꾸는 판타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최근 방영된 일일드라마의 에피소드는 흥미로운 또 다른 ‘재현씨’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결혼을 앞둔 한 젊은 남성이 있다. 그는 맞선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한 여성을 만났고 곧이어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그에게는사랑하는 다른 여성이 있으며, 그녀가 자신의 집안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남성은 자신의 집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성과 결혼은 하지만, 자신의 사생활은 사랑하는 여성과 꾸려나갈 것을 계획한다. 이러한 그의 계획이 신혼여행지에서 밝혀지지만, 그는 그다지 당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분노에 사로잡힌 신부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그 남성은 자기의 신부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기와 그녀와의 결합이 사회적으로 그다지 나쁠 것도 없다면서 자신의 계획에 동참하기를 제안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계획이 양가 부모님에게 알려지면서 모든 것은 무산된다. 그리고 드라마는 전형적인 신파로 돌입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드라마 속 남성이 제안한 그 내용이 바로 재현씨의 또 다른 문화적 위치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재현씨의 사랑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그 계급적 취향을 모방하는 ‘그녀’의 주체는 서로 다른 두 계급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분열된다. 그 분열은 재현씨의 취향에 대한 교섭으로 확장되며, 그 사이에서 그녀의 불완전한 정체성이 형성된다. 재현씨의 사랑을 갈구하는 그녀는 자신의 재현씨가 일일 드라마의 그 남성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그 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어떤 상태의 재현씨라도 언제든지 교섭할 혹은 모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대해 이제는 펑크적으로 저항하지 않을것이다. 그녀는 위선으로 가득 찬 교활한 교양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그녀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녀는 설사 재현씨가 일일연속극의 남성처럼 돌변하여 그와 같은 제안을 할지라도, 그녀는 오히려 교섭을 통한 또 다른 게임의 장場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 자신의 혼성적 스타일을 찾아낼 것이다. 수 많은 이혼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낸 이름 모를 여성들처럼 말이다. 남자친구 없으면 자가용도 없다, 이것은 그녀의 교섭적 위치를 드러내는 명제에 불과하다. ‘남자친구가 없으면 자가용도 없다’는 현대의 물신주의를 단순히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교섭적 위치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차원을 열어줄 제3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창조적 열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다른 두 계급이 만들어 내는 문화적 게임의 법칙에 대한 또 다른 타자로서 작가의 응시이다.
⟨비헬라 벨라 BiHalla Bellad⟩에서 보이는 작가의 목소리는 이러한 혼성적 타자의 미끄러짐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 위치한 고급 의류매장에서 무시를 당한 동양인 아가씨는 자신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 볼패션의 메카, 밀라노로 떠날 결심을 한다. 그녀는 이탈리아 촌구석에서 일하는 매장 여직원의 무례함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그녀는 상황이 어떻게 맥락 화되든지 간에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밀라노에 갈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고급 브랜드를 통해 스타일화하고자 할 뿐이다. 돈이면 모든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천박한 동양 여성으로 그녀가 규정 되든, 동양 여성의 구매력이 아니고서는 지탱할 수 없는 허약하고 허영에 가득 찬 오트코튀르 패션산업이라고 그녀가 비아냥거리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상호 전도되는 혹은 교섭하는 그 순간이 의미있는 것이다.
그리고 길가에서 굶주린 개들을 위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아름다운 아가씨는 그러한 개들이 보이지 않자,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노래 부르는 외국인 소녀를 보고, 그녀를 위해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아가씨의 이러한 선택과 결정에 윤리적인 문제를 들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개가 없기 때문에 소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없는 상황에서 굶주린 소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소녀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그녀의 노래가 더 많은 돈을 소녀에게 제공할 수도 있으며, 서로 친구가 되어서 개들을 위한 콘서트를 만들 수도 있다.
사회적 정형화는 대부분 정형화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는 근대적 의미의 주체가 타자를 자신의 상징체계 안에 포섭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불완전한 물신화 과정일 뿐이다. 복날에 죽어가는 개들을 위해 노래 불렀던 작가에게 부잣집 딸내미의 철없는 퍼포먼스라고 치부했던 것도, 명품 브랜드를 줄줄 외며 그 미세한 차이를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편견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주체들의 삶의 형태에 대한 공포를 방어하기 위한 대체물에 불과하다. 근대적 주체가 식민자이든 지배자이든 간에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취향과 맞닥뜨리는 순간 그들은 공포를 느끼게 되고, 그 공포를 메우기 위해서 타자에게 정형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타자에 대한 이러한 정형성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타자는 매번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불완전한 물신, 즉 상징계의 정형성 내부에서 계속 미끌어지거나 반복해서 새로운 가면으로 바꿔 쓰기 때문이다.
개인적 역사의 삭제와 사회의 호명
⟨비엘라 시티Biella City⟩는 작가가 이탈리아 비엘라에서 레지던스에 참여하면서 경험한 4개의 에피소드를 도심의 광고판에 붙이면서 시작된 작업이다. 4개의 에피소드는 외국인 여성이 이질적인 문화권의 작은 도시에서 쉽게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다. 작가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비엘라에서 겪은 네 가지의 경험내용을 도심의 광고판에 붙이고 지역주민들과 작은 대화의 장을 갖는다. 작가는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비엘라에 오면서 자신의 역사는 사라지고 외국인 여성으로서 다시 정의내려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대화에 참여한 다른 비엘라 거주 외국인 여성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정의되어 지는 지를 지극히 일상적으로 대답한다.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에 등장하는 파키스탄인 주인공의 아버지처럼, 한 여성은 자국에서는 매우 인텔리였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현지 남성과 결혼한 그저 그런 여성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어린 시절에 이탈리아로 이민을 왔다는 다른 한 여성은 직업을 구하는 데 있어 매번 좌절을 겪는다고 고백한다. 이탈리아에서 이들 외국인 여성들의 역사는 그렇게 무화되었다.
작가는 비엘라 도심을 걸어 다니면서 자주 경찰관으로부터 신분증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경험이 없던 작가에게 이것은 일종의 인종차별적인 태도로 읽혀진다. 작가는 자신을 불법체류자로 인식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경찰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는 그리 길어지지 않는다. 짧은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 그들의 대화는 종결된다.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 비엘라 주민은 작가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겪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남편도 외모가 특이하기 때문에 종종 경찰관들로부터 제지당하고 신분을 확인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인인 자신들도 경험하고 있는 어떤 불합리한 지점이라고 강변한다.
다른 에피소드는 3,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성에게 당한 성추행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차에 타라는 제안을 작가가 거부하자, 그 남성은 자신의 성기를 작가에게 보여준다. 작가는 모든 서양 남성들은 동양인 여성들을 게이샤로 아는 것일까, 하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서 한 이탈리아 여성은 이러한 경험 역시 자신도 종종 경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외국인 여성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사회적 차별의 문제라고 정의한다.
작가는 또 도시에서 3명의 소년들에게 소매치기를 당한다. 물론 범인은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녀의 돈은 되찾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 한 청중은 그것은 외국인 여성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엘라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외국인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돈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비엘라에 체류하기 위해서 여성들은 임신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는 임신이라는 것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만 그것을 요구하는 것에 부당함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레지던스에 참여한 여성 작가들이 임신보험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료 남성 작가들이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에 대해서 경찰 검사관은 매우 행정적인 답변을 들려주었고, 한 작가는 오히려 보험에 가입한 여성들을 보며 기뻐한 남성 작가들에 대해서 비난했다. 작가가 경험한 4개의 에피소드는 단순히 소수자로서 여성에 대한 차별, 그리고 백인 사회에서 유색 인종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인종차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에피소드들의 중요한 지점은 한 문화권 내부에서 소수자 잉여의 목소리가 주는 공포와 그것이 생성해내는 빈 공간의 역사는 지워졌으며, 그 소수자의 현재는 그 문화권에서 구축한 소수자에 대한 정형화의 틀 내부로 봉합되었다는 데 있다. 즉 작가가 경험한 이 사건들은 자신의 역사가 지워진 상태에서 타자에 의해서 새롭게 자신의 현재 혹은 정체성이 강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다른 문화권 내부에서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식의 여행에 대한 낭만적 경험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경험한 것이 특수한 것이 아니라 비엘라 시민들에게도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경험이라고 강변하는 여성 관객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중요한 지점은 주체의 위치가 국경을 넘으면서 타자 혹은 소수자, 즉 임의로 규정될 수 있는 피식민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지역주민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만든 것은 자신이 경험한 차별을 성토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식민주의적 상태에 놓인 자신의 위치에 대해 탈식민주의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작가가 언급하고 있는 비엘라의 외국인 여성들은 피해자로서 혹은 비엘라의 인종차별적인 상황의 증거물로서그 공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비엘라라는 근대적 주체를 응시하는 타자로서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 모든 대화는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졌다. 작가는 이탈리아어를 알아 듣지 못할 뿐더러, 비단 누군가가 영어로 통역해주었다고 해도 소통은 그렇게 요원한 것이었다.
소설『*인도로 가는 길』에서 아델라는 마라바르 동굴에서 들리는 이해 불가능한 어떤 소리에 공포를 느끼고, 이 여행을 주선한 인도인 아지즈를 강간범으로 고소한다. 아델라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 궤도 밖의 목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 그것을 공포로 치환하고 그 공포의 체험을 제공한 아지즈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아델라의 공포는 식민주의의 타자성을 암시한다.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나는그가 무엇을 원하는지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로 변한다.
무의미nonsense의 공포는 이렇게 식민주의의 소외에 대한 자기보호 기제로 작동한다. 아델라의 공포는 자신의 언어체계로 해석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공포이며, 이것은 타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식민자적 주체 내부의 문제이다. 그리고 아지즈에 대한 고발은 이러한 무의미의 영역에 포함 되거나, 혹은 그 무의미의 영역과 언제든지 공모할 수 있는 타자를 단죄하는 궤도의 제도적 힘이다.
경기도 일산의 한 독일풍 레스토랑에서 노래하는 필리핀 여가수와의 만남을 음악으로 표현한 프로젝트인 ⟨뿌빠빠 음와 언어 Pupap Mwa Language⟩를 이해 하는 길은 다소 난해하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다 흥이 나서 흥얼거리는 의성어 인 ‘뿌빠빠 음와’는 어딘지 모르게 필리핀 여가수의 맥락과 그다지 상통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기대하는 필리핀 여가수의 친절한 미소와 이지리스닝 팝 뮤직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서 ⟨뿌빠빠 음와 언어⟩가 외국인 노동자라는 타자에 대한 한국인 작가의 환대hospitality인 것도 아니다.
⟨뿌빠빠 음와 언어⟩에서 경험하게 되는 우리의 당혹스러움은 일종의 공포이다. 이러한 공포는 식민주의적 공포의 전형을 보여준다. 필리핀 여가수라는 타자의 문화적 위치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재현하는 것은 작가의 의무가 아니다. 작가가 필리핀 여가수를 만나서 한판 흥겹게 노는 새로운 문화적 장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는, 우리 내부의 식민자적 욕망의 또 다른 분열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필리핀 여성 가수의 위치는 동시대 한국에서, 한국이라는 사회가 용인한 문화적 여가의 범주 내부에서 배경과 같다. 그들과 그들이 펼치는 무대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인테리어 장식품에 불과하다.
작가는 ⟨뿌빠빠 음와 언어⟩ 프로젝트를 통해서 필리핀 여가수의 위치를 번역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의 위치를 더욱 해독 불가능한 언어의 상태로 상정한다. ‘뿌빠빠 음와 언어’는 음악의 바깥에서 음악이 아닌 것으로 존재 하지만 음악의 형식으로 우리 앞에 있다. 이것은 일종의 ‘소음’이자 ‘잡음’이다.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잡음은 주체를 위한 기표의 자리매김 이 후의 잉여물이다. 잉여가 내는 목소리는 궤도 내부의 사람들에게서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반문을 받게 된다. 이러한 질문은 잉여물, 즉 잡음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태도라기보다, ‘왜 궤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라는 강제의 작동원리이다. 또한 근대적 주체, 다른 이름으로는 식민자적 주체가 고백하는 공포인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필리핀 여가수를 한국 사회에서 보다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뿌빠빠 음와 언어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필리핀 여가수와 의 만남을 통해 타자, 즉 피식민자로서 위치지워졌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다. ⟨여행가방 칸타타⟩는 무의미의 존재로 비엘라라는 공간 내부에서 배경처럼 살았던 자신의 경험을 외치는 것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자아,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 이것은 한국말이라 여러분들이 / 알아들으실 수 없으시겠지요? / 혹, 영어로 하면 /
알아들으실 수 있으신지요? / 그럼 제가 이탈리아어 같은 소리를 / 흉내내어 볼까요? / 콴타라 코스툴라레? 콴도쿠치네. /
마키나 라 에 이오 소노 코레아나. / 투토 콘다 지오넬라, / 소렌토로 시에나 벨라 아르마니 에 / 구치나 데 델 아 달라 파스타, /
바스타, 언더스탄지오네!
그러나 이 노래는 친절하게 영어로도 이탈리아어로도 번역되지 않는다. ‘JAA, IJE SIJAKHARYU HAMNIDA’로 시작되는 작가의 번역본은 무의미하 게 알파벳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자아, 이제’와 ‘JAA, IJE’ 사이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행가방칸타타⟩에서 기의는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탈각되고, 비엘라라는 공간이 유지시키는 근대적 주체의 청각체계에 소수자의 본질로 다가설 것이다. 이것은 번역 불가능한 의미가 아니라 ‘번역을 바라지 않는 의미들의 목소리’ 라는 물질화된 언어로 전이 되어, 소수자의 존재를 증명해 내는 실체가 된다. 문자적 인식체계가 갖는 거대한 권력장 내부에서 잡음과 같은 이 목소리는 근대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소수자의 문화적 위치를 대변한다.
작가의 행위—탈식민주의적 공간의 구축
필리핀 여가수와 함께 만들어낸 뿌빠빠 음와 언어는 마라바르 동굴에서 아델라가 경험했던 문화적 기억과 식민자적 욕망의 맥락으로 우리를 위치지운다. 우리는 이해 불가능한 뿌빠빠 음와 언어가 단순히 서울 근교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필리핀 여가수가 부르는 그저 그런 노래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필리핀 여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일종의 식민주의적 현재의 언표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뿌빠빠 음와언어는 균질한 공간 내부에서 작동되는 무질서를 상징하며, 식민주의적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혼란을 야기하는 어떤 새로운 무엇을 창조한다. 이것은 단순히 무의미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궤도와 그 외부 사이의 빈 공간을 상징한다. 이것은 언어의 외부에서 경험하게 되는 소수자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언어의 법칙이 근대적 서사체계의 어떤 것이라면 구조화되지 않은, 혹은 의미화되지 않는 언어들을 발화하는 주체들은 근대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 사이를 미끄러지면서 근대적 인식체계 내부의 새로운 분열을 생성한다. 궤도 외부에 존재하지만 궤도 내부에서 그들이 인식할 수 없는 언어를 작동시킴으로써, 무의미의 언어들은 근대적 주체의 불완전한 욕망과 그것의 분열을 더욱 강화시킨다.
문화적 차이가 야기하는 언표작용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간극을 투사한다. 우리는 타자에 의해서 새롭게 구축되는 기의들과 교섭하면서 그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지금 혼성적인 문화의 위치에서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해석학적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서로 다른 문화를 합리적으로 해석 해낼 수 있는 코드를 우리 내부에 구축하기 위한 시도도 아니며,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이 야기하는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도 아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피식민자적 타자를 자연의 위치에 봉합시키고자 하는 인본주의를 가장한 근대적 주체의 유연한 변신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무의미한 행위들을 통해서 현재의 문화적 위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혹은 원시성의 강화를 통해서 균질한 언어적 지평을 공격할 것을 상상해야 한다. 아니면 현재 우리의 문화적 위치에 대한 공포를 더욱 강화 시킴으로써 그들의 상징계를 우리의 실재의 위치와 교섭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창조할 저항방식은 근대적 권력이 행사되는 과정에서 인종적, 성적, 문화적 차이의 계기를 통해 이중화의 분열을 발생시키고, 그 이중화의 과정에 타자로서 적극 개입하는 일이다. 이것이 문화와 역사의 일반화 과정을 전복시키며, 혼성적 시간과 새로운 혼성적 진리 속에서 식민지적 텍스트를 봉합하고, 탈식민주의적 공간을 구축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호미 바바는 푸코의 미시 서사, 연약한 서사를 탈식민지적 공간에 위치지운다. 푸코가 근대적 인식체계의 이중성과 대면하면서 목격하게 된 역사적 주체는, 환유적이고 불확정적인 사건의 무한연쇄 속에서 자신의 문화적 에피소드를 타자의 에피소드에 관련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비본토적 인식,즉 타자로서의 인식을 구성하는 주체이다. 푸코는 근대적 주체의 한계를 서구적 인식체계 내부로 다시 귀결시켰다. 반면에 호미 바바는 이러한 근대적 주체가 식민지적 관계의 시간적 지연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해석함 으로써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문화적 차이의 한계상황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구성했는지 언급하였다.
조은지의 텍스트는 사회적 질서와 탈주체화된 기호의 분절 사이에 존재하는 가변적인 긴장 속에서 시간의 지연을만들어내며, 이를 통해서 타자의 개입과 간섭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한다. 작가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만나는 그 공간에 타자로서 틈입하여 자신의 혼성성과 이질적인 언표작용을 도입한다. 무의미의 영역이 작동하는 빈 공간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궤도의 외부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새로운 원료’가 된다.